영어가 바꾼 내 일과 삶

한국에서 나고 한국에서 자라 지금까지 해외에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던 내가 어느덧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 5년이 넘었다. 요즘은 예전만큼 열정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지만, 공부를 완전히 멈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작은 굉장히 단순했다. 회사에서 영어 공부를 하면 일정 금액을 페이백해주는 제도가 있었고, 가성비에 절여진지라 안 쓰면 낭비라는 생각에 시작했다.

직장인으로서 혼자 공부를 지속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효율과 동기 부여를 위해 다양한 도구를 시도했다. 전화영어, 학습 앱, 과외, 영어 원서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써봤다. 회사에서 일부 비용을 지원받았지만, 지금까지 누적 투자금을 합쳐보면 2천만 원은 훌쩍 넘는다.

영어 공부에 대한 방법과 정보는 세상에 넘쳐나지만, 정작 영어를 할 수 있게 되면 바뀌는 경험에 관한 이야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영어를 한마디도 못 했던 토종 한국인 엔지니어인 내가 지난 5년간 영어를 공부하며 실제로 어떤 변화를 경험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내 일상과 커리어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나눠보려 한다. 1월은 누구나 자기 계발을 결심하는 시기이기에,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자극이 되었으면 한다.

커리어

영어로 일상적인 대화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면서, 가장 먼저 커리어 변화에 활용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실행한 일은 일하는 환경을 바꾸는 것이었다.

현재 다니는 회사의 조직은 절반 이상이 비한국어 화자이고, 대부분의 문서와 회의가 영어로 진행된다. 처음엔 쉽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경험한 문화적 다양성과 사고의 차이는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는 자산이 되었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협업하며 느낀 것은, 내가 생각보다 작은 세상에 살았다는 사실이었다. 다양한 관점의 사고, 폭넓은 위임, 그리고 스스로 책임지는 문화 속에서 일하면서 나도 점점 새로운 인사이트와 다양성에 기반한 유연한 사고를 익혀갔다. 만약 여전히 한국 기업들만 다녔다면 절대 만날 수 없던 성장의 형태였다.

물론 이전의 회사들도 굉장히 좋은 회사이고 상황에 맞는 좋은 경험을 했다. 따라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서구식 업무 문화가 언제나 좋고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느슨하고, 사고가 비슷하지 않은 여러 의견이 답답하고, 효율적이지 않게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중 좋은 부분을 선택적으로 흡수하며 나만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문화적 경험 외에도 현실적인 기회도 늘었다. 영어 덕분에 빅테크를 포함한 영어로 진행되는 국내외 다양한 회사와의 면접을 문제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떨어지거나 기회를 잡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언어가 기회의 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관계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이제 26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수는 앞으로 더 늘어날 거 같다. (케이팝 데몬 헌터즈 만세) 물론 모든 외국인이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한다는 점.

영어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면서, 내 인간관계의 폭은 이전보다 넓어졌다. 회사 동료를 포함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졌다. 언어나 문화의 차이를 경험하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하고 책이나 뉴스로 접하는 문화차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다른 사람과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걸 기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게 상대를 더 이해하는 길이란 것도 배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다른 나라를 이해할수록 한국을 더 사랑하게 되기도 한다.

올해 새해에는 롯데타워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서 친구 집에서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홈 파티를 했다. 각자가 가져온 음식, 음악, 생각, 그리고 각자 나라의 새해 풍습을 배울 수 있는 자리였다. 스페인에서 온 친구 덕분에 자정에 포도 열두 알을 먹으며 소원을 비는 전통을 따라 하기도 했다.

이처럼 영어를 배운다는 건 단순히 말하기 능력을 익히는 게 아니라, 세상과 연결되는 새로운 통로를 여는 일이다. (때론 사랑의 통로가 되기도…)

기회

커리어나 인간관계처럼 큰 축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기회가 일상 곳곳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예전의 나는 누가 영어로 말을 걸까 무서워, 그래서 많은 상황을 애초에 피하거나 지나쳤다. 그런데 이제는 영어가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을 넓혀주기 시작했다.

최근에 아세안 소속 나라에서 다양한 온 학생들을 대상으로 발표할 기회가 생겼다. 5년 전의 나라면 즉각 거절했을 기회인데, 언어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여행에서도 이득이 많다. 여행지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대체로 열려 있고, 그래서 짧은 대화가 그날의 추억이 되기도 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맛집이나 관광지 팁을 자연스럽게 교환하기도 했고, 이동 수단에서 옆에 앉은 분이 한글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한글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깊은 관계로 이어지진 않아도, 이런 게 기억에 오래 남는 추억이더라.

유용했던 경험도 있었다. 함께 여행하던 분께서 미국 내에서 비행기 일정을 잘못 잡아 비행기를 놓쳐버린 적이 있는데, 즉각 카운터에서 상황을 설명하고 간곡히 부탁해서 해결한 경험이나, 렌터카 회사에 도착했더니 차가 없다며 예약한 모두를 돌려보내고 있었는데, 예약 상황을 차분히 설명하고 우리 사정을 정중하게 부탁해 결국 차량을 구할 수 있었다.

일상에서도 작은 변화는 이어졌다. 복잡한 지하철에서 길 잃은 여행객을 돕거나 운영하는 밋업에 비한국어 화자가 참석해도 전처럼 긴장하지 않게 됐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삶에 작디작은 기여를 할 수 있는 기회들이 늘어났다.

마지막으로, 이 업종에 있다 보면 많은 해외 컨퍼런스에 참여할 기회를 얻곤 한다. 컨퍼런스는 지식을 교환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넓히는 자리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언어라는 제약 때문에 그 기회를 끝까지 활용하지 못한다. 이번 리인벤트에서 보안 일을 하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려 했고, 여러 사람과 관계의 첫 단추를 끼웠다. 관계는 하루 만에 깊어지지 않지만, 시작이 있어야 다음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들과 다시 이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

끝으로

돌이켜보면, 돈 때문에 시작했던 영어는 나에게 스펙이나 취미가 아니라 인생의 잠긴 문을 여는 키에 가까웠다. 어떤 문은 커리어로, 어떤 문은 발표 기회로, 어떤 문은 위기 해결로 이어졌다. 그래서 요즘 공부량이 예전만 못해도, 나는 공부를 계속 놓지 않으려고 한다. 이는 삶의 다양한 문을 계속 열어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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